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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프트] '예상대로' 1순위 황준서 "롤 모델은 헤이더…한화 우승 목표"

역시 1순위는 황준서(18·장충고)였다.황준서는 14일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2024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한화 이글스의 유니폼을 입었다.일찌감치 예견된 결과였다. 이미 겨울부터 장현석(마산용마고)과 자웅을 겨루는 최대어로 꼽혔고, 장현석이 LA 다저스와 계약하면서 비견할 선수가 적었다. 오른손 김택연(인천고)가 급부상했으나 한화는 이변 없이 황준서를 골랐다.지명 후 취재진과 만난 황준서는 "선발, 불펜과 상관 없이 위기 상황 때 찾는 투수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롤 모델로는 메이저리그(MLB)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마무리 투수 조시 헤이더를 꼽은 그는 팬들에게 "제구력과 경기 운영 능력이 제 강점이다. 타자를 삼진 잡을 수 있는 구위도 있고, 타자를 쉽게 쉽게 상대할 줄 아는 투수"라고 자신을 소개했다.다음은 황준서와 일문일답.-한화라는 팀에 대한 인상은."(한화 선수 중) 아는 형들이 많이 있다. (환경이) 깨끗한 구단이라고 들었다. 좋았다." -친한 한화 선수는.(장충고 선배인) 이민준 형과 친하다. 문현빈 형과도 친하다. 민준이 형이 꼭 오라고 연락했다.-어떤 투수가 되고 싶나."위기 상황 때 찾는 선수가 되고 싶다. 보직은 상관 없다."-15번 등 번호를 희망한다고 들었다. 15번은 한화에서 구대성이 달았던 번호인데."15번을 달고 내 성적이 좋아 그후로 쭉 15번을 달았다. 프로에서도 열심히 하겠다."-스스로 어떤 투수인지 어필해준다면."제구력과 경기 운영 능력이 좋은 투수다. 타자를 삼진잡을 구위도 있다. 타자를 쉽게 쉽게 상대할 줄 아는 투수기도 하다."-스플리터는 언제부터 던졌나."중학교 때부터 조금씩 던지고 있다. 고등학교에 와서 이렇게 힘이 될 줄 몰랐다. 중학교 코치님께서 권유하셔서 계속 연습해 익혔다."-김택연과 같이 1, 2순위를 나눠 가졌다. 소감은."이름이 불리기 전까지 택연이와 저 중 누가 1순위가 될지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택연이처럼) 잘하는 선수들 사이에서 1번을 받게 돼 정말 영광이다."-국내 또는 MLB 선수 중에 롤모델로 삼는 투수가 있다면."조쉬 헤이더 선수를 많이 봤다. 국내 선배들은 전부 본다."-상대해보고 싶은 선배가 있다면."이정후(키움 히어로즈) 선배님, 강백호(KT 위즈) 선배님을 꼽겠다."-장충고 동기들이 한화에도 많이 왔고, 프로에 많이 지명(7명)됐다."내가 지명받은 후 다른 친구들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간절했다.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보다 친구들이 불릴 때가 더 좋았던 것 같다."-목표가 있다면."개인적인 목표보다는 팀 우승이 먼저다. 팀이 최대한 높게 갈 수 있도록 열심히 던져보고 싶다."차승윤 기자 chasy99@edaily.co.kr 2023.09.14 17:08
프로야구

[주간 MVP] "류현진 선배 영상 분석"...윤영철, 독학한 체인지업 앞세워 '신인 돌풍'

KIA 타이거즈 신인 좌완 투수 윤영철(19)은 지난주 KBO리그 투수 중 가장 빼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6일 SSG 랜더스전에서 7이닝 2실점, 11일 두산 베어스전에서 6이닝 3실점을 기록했다. 타선의 득점 지원이 적었던 탓에 모두 패전 투수가 됐지만, 주간 최다 이닝을 소화하며 선발 투수 임무를 잘 해냈다. 조아제약과 본지는 윤영철을 6월 둘째 주 주간 최우수선수(MVP)로 선정했다. 윤영철은 “외부 시상식에서 처음으로 상을 받아 본다. 팀 승리에 도움 되기 위해 노력한 모습을 좋게 봐주신 것 같다. 또 수상할 수 있도록 더 잘 할 것”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윤영철은 지난해 9월 열린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에 지명받아 KIA 유니폼을 입은 특급 유망주다. 지난 2~3월 치른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에서 경쟁력을 증명했고, 바로 선발진 한자리를 차지했다. 15일 기준으로 10경기에 등판, 3승 3패·평균자책점 3.08을 기록하며 슈퍼루키다운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신인왕 경쟁에서도 가장 앞서 있다. 윤영철은 “최근 8경기에서 5이닝 이상 막아냈다. 이 점은 만족한다. 등판한 경기에서 내가 패전을 기록해도, 불펜 투수 한 명이 쉴 수 있으면 다음 경기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설 것”이라고 데뷔 10경기를 돌아봤다. 올 시즌 윤영철의 포심 패스트볼(직구) 평균 구속은 138㎞/h다. 공은 느리지만, 스트라이크존 상하좌우 구석을 원하는 대로 찌를 수 있는 제구가 일품이다. 주 무기도 날카롭다. 상대 팀 지도자와 타자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체인지업 얘기다. 모든 투구 동작이 직구를 던질 때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고,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의 회전도 직구와 흡사하다고 한다. 올 시즌 163개를 던진 체인지업의 피안타율은 0.093에 불과하다. 윤영철도 “선배 타자들이 ‘직구와 똑같이 오다가 딱 홈 플레이트 앞에서 가라앉아서 타이밍 잡기 어렵다’고 하더라. 자신감을 갖고 던지고 있다”라고 했다. 윤영철은 고교 1학년이었던 2020년 3월, 독학으로 체인지업은 연마했다. 그는 “코치님이 그립을 가르쳐 주셨고, 이후 체인지업을 잘 던지는 국·내외 투수들의 투구 영상을 보고 연구했다. 특히 슬로 모션 영상을 통해 투수들이 공을 손에서 놓을 때 어떻게 하는지 유심히 봤다”라고 전했다. 윤영철이 가장 많이 본 영상은 한국 야구 대표 투수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의 투구 모습이었다. 류현진은 2006년 KBO 리그 데뷔 첫 시즌, 팀 선배였던 구대성에게 체인지업을 배운 뒤 자신만의 주 무기로 만들었다. 체인지업으로 KBO리그와 메이저리그(MLB)를 호령했다. 윤영철은 “원래 영상은 던지는 손을 가리지 않고 봤지만, 류현진 선배님은 같은 왼손 투수여서 더 많이 봤다. 무엇보다 내가 접할 수 있는 영상 중엔 선배님이 체인지업을 던지는 모습이 가장 많았다"라며 웃어 보였다. 윤영철은 체인지업 연마 한 달 만에 실전에서 활용했고, 4개월 만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보통 좌투수는사구와 장타 허용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좌타자와 승부에서 체인지업을 잘 던지지 않는 편인데, 현재 윤영철은 좌타자 몸쪽 구사도 주저하지 않을 만큼 높은 체인지업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팀 선배 양현종·이의리에게 구하는 조언도 체인지업이 아닌 슬라이더나 커브라고. 윤영철은 지난 9일 발표된 항저우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 최종 명단(24명)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체인지업 마스터'로 성장하고 있는 선수지만, 아직 프로 무대에서 보여준 게 너무 적다. 윤영철은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눈앞 할 일에 더 집중해야 할 것 같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어 그는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언젠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운드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팀에서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겠다. 결과에 너무 신경 쓰면 정신이 다른 데로 가는 것 같더라. 기대치가 높아져도, 지금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안희수 기자 anheesoo@edaily.co.kr 2023.06.16 06:30
야구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⑨] '대성불패' 구대성

등판하면 지지 않는다. 이름 뒤에 불패(不敗)가 붙었던 선수, ‘대성불패’ 구대성(53)이 일간스포츠가 선정한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 불펜 투수 부문에 선정됐다. 20대부터 50대까지 세대별 야구인 10명씩 총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오승환(32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총 19표를 얻었다. 이동욱 NC 다이노스 감독은 "언제든지 믿고 투입할 수 있는 투수"라고 했다. 이대진 SSG 랜더스 투수코치는 "불펜 투수는 10번 중 7~8번은 성공해야 한다. 구대성은 그에 가장 가까운 투수"라고 했다. NC 이용찬은 "구대성 선배님은 던지는게 참 시원시원했다"고 했다. KT 위즈 소형준은 "오승환 선배님 다음으로 임팩트가 가장 강하게 남아있다"고 전했다. 구대성은 고교 시절부터 담대한 배짱으로 주목 받았다. 대전고 2학년 시절이던 1987년 연습 경기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선발로 올라왔던 그는 1회 초부터 3연속 볼넷으로 무사 만루를 허용했다. 이병기 당시 대전고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오자 그는 “절 테스트하는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결론은 3연속 탈삼진 무실점. 배짱 테스트는 성공이었다. 그해 대전고는 청룡기에서 창단 첫 전국대회 우승을 거뒀다. 한양대 진학 후 그는 1990년 국제야구연맹(IBA) 대회 최우수선수(MVP), 1991년 대륙간 컵대회 최고 투수상, 1992년 대통령배 최우수 투수상을 받았다. 구대성에게 연고팀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 전신)는 계약금 1억 2000만원을 선사했다. 프로 시작부터 ‘불패’는 아니었다. 고교-대학 때 너무 많이 던져 어깨에 탈이 났다. 시속 140㎞대 후반을 기록했던 구속이 130㎞대까지 떨어졌다. 2년 차 때부터 꽃을 피웠다. 마무리를 맡으며 34경기(선발 9경기)에 등판해 7승 8패 12세이브 평균자책점 2.60으로 활약했다. 이듬해에도 47경기(선발 12경기) 4승 14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3.54를 기록했다. 완투도 6번이나 기록했지만, 승운이 따르지 않아 다패왕에 올랐다. 긴 이닝을 던지고 선발까지 겸하는 이른바 ‘중무리’였지만 묵묵히 맡은 바를 해냈다. 동시대를 뛰었던 조원우 SSG 코치는 "선발과 마무리를 전부 잘했다. 전성기 구위가 최고였다"고 전했다. 1996년, 드디어 불패의 수호신이 됐다. 55경기에 등판해 55경기 139이닝 18승 3패 24세이브 평균자책점 1.88 탈삼진 183개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다승 공동 1위, 세이브 2위, 승률 1위, 탈삼진 3위를 기록했고, 규정 이닝을 채워 평균자책점 1위까지 독차지했다. 당시 수상 기준이던 세이브 포인트(구원승+세이브) 40개로 구원왕까지 오르며 4관왕에 올랐다. 정규시즌 MVP와 투수 골든글러브도 당연히 그의 차지였다. 대성불패라는 별명도 탄생했다. 구대성을 불패의 투수로 만든 건 투구폼, 그리고 배짱이었다. 그는 타자에게 등을 보인 채 와인드업하는 토네이도 폼으로 타자와 주자를 위협했다. 등뒤에서 빠르게 공을 뿌려 구종을 숨기는 디셉션(Deception)의 달인이었다. 무엇보다 강한 멘털이 구대성의 최고 결정구였다. 강속구가 사라진 후에도 자신있게 스트라이크를 꽂아넣었다. 김종국 KIA 타이거즈 감독은 "구대성 선배처럼 배짱 있는 투구를 하는 투수를 본 적 없다"고 했고, KT 위즈 박경수는 "구대성 선배님의 릴리스 포인트가 보이지 않았다. 우타자 몸쪽과 바깥쪽 제구도 자유자재로 하셨다. 너무 까다로웠다"고 떠올렸다. 구대성의 공은 큰 무대로 갈수록 빛났다. 한화의 첫 우승을 이끈 것도 구대성이었다. 1999년 한국시리즈 5경기에 모두 등판해 1승 1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0.93으로 뒷문을 걸어 잠그고 시리즈 MVP가 됐다. 김인식 전 감독은 "리그뿐 아니라 국제대회에서 활약이 돋보였다"고 했다. 국제대회에서는 역사상 최강의 일본 킬러로 통했다. 대학 시절 1989년 대륙간 컵에서 후일 메이저리그(MLB) 123승에 빛나는 노모 히데오와 맞대결에서 18탈삼진 완투하며 명투수전을 펼쳤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3·4위전에서 마무리가 아닌 선발로 등판, 155구를 던지며 9이닝 5피안타 1실점 완투승으로 동메달을 한국에 안겼다. KBO리그를 평정한 구대성은 2001년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블루웨이브스와 계약했다. 첫해 선발, 중간, 마무리를 오가며 7승 9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4.06을 기록했다. 이어 2년 차 5승 7패 평균자책점 2.52로 퍼시픽리그 평균자책점 2위로 활약했다. 2004년까지 오릭스에서 뛴 그는 2005년 도전의 무대를 미국으로 옮겼다. MLB 뉴욕 메츠와 계약해 33경기 23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3.91 6홀드를 기록했다. 투수가 아닌 타자로 이야기를 남겼다. 5월 22일 뉴욕 양키스전 타석에 들어서 당대 최고 투수 랜디 존슨의 직구를 통타해 2루타를 쳤다. 공격적인 주루로 결승득점까지 기록했지만, 주루 때 어깨를 다쳤다. 결국 그해 9월 지명할당(DFA) 처리되어 미국 생활을 마무리했다. 2006년 귀국한 구대성은 한화의 수호신으로 복귀했다. 평균자책점 1.82 37세이브(리그 2위)를 거두며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이끌었다. 이어 2007년에도 26세이브를 기록했다. KBO리그 역대 최초로 7년 연속 20세이브, 최연소·최소 경기 200세이브를 남겼다. 그러나 영원히 불패는 아니었다. 2008년 마무리에서 물러나며 이후 커리어에서 단 1세이브에 그쳤다. 2010년 한화 유니폼을 벗었지만, 그의 야구가 끝난 건 아니었다. 그해 11월 호주 프로야구(ABL) 시드니 블루삭스와 계약했다. ABL 통산 6시즌을 뛰고 평균자책점 2.13, 구원왕 3번을 받고서야 24시즌, 4개국에 걸쳐 이어갔던 수호신의 역사를 마무리했다. 차승윤 기자 cha.seunyoon.joongang.co.kr 2022.01.25 07:36
야구

꿈꾸는 KIA, 왼손이 든든해

‘왼손 파이어볼러(강속구 투수)는 지옥에서라도 데려온다’. 야구계에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속설이다. 그만큼 강속구를 던지는 왼손 투수가 긴요하다는 뜻이다. 지난해 하위권(9위)에 머물렀던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가 왼손 투수 트로이카를 앞세워 도약을 노리고 있다. 2017년 최우수선수(MVP) 양현종(34), 지난해 신인왕 이의리(20)와 외국인 투수 션 놀린(33·미국)이 그 주인공이다.KIA는 해태 시절부터 왼손 투수가 많지 않은 편이었다. 선동열,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윤석민 등 간판 투수 대부분이 우완이었다. 창단 이후 39년 동안 두 자릿수 승리를 한 번이라도 기록한 왼손 투수는 딱 3명이다. 신동수가 두 번(1991, 92년), 김정수가 한 번(93년) 10승을 넘겼다. 나머지 한 명이 양현종이다. 2007년 데뷔한 양현종은 무려 9차례나 10승 이상을 따냈다. 2014년부터는 7시즌 연속 10승 이상을 거두면서 기록을 이어갔다.양현종은 지난해 미국으로 떠났다. 메이저리그(MLB)에서 뛰겠다는 일념으로 스플릿 계약을 맺었다. 연봉 손해까지 감수했지만, 그의 도전은 아쉽게도 실패로 돌아갔다. 12경기에 나와 3패에 그치면서 평균자책점 5.60을 기록했다. 어렵게 선발 기회를 잡았지만, 승리를 따내지 못했다. 1년 만에 돌아온 양현종은 일찌감치 KIA 복귀를 결정했다. 계약조건을 놓고 줄다리기를 했지만, 결국 4년 총액 103억원(계약금 30억원, 연봉 25억원, 옵션 48억원)에 사인했다.양현종은 미국 진출 직전인 2020시즌엔 11승 10패, 평균자책점 4.70에 그쳤다. 평균자책점 1위(2.29)에 오른 2019년과는 대조적이었다. 볼넷이 급격하게 증가(9이닝당 1.61개→3.34개)한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양현종의 구위나 구속은 여전하다. 지난 시즌 미국에서 뛸 때도 평균 구속은 90마일(약 145㎞)이었다. 신임 김종국 KIA 감독은 “양현종이 합류하면서 국내 투수진이 안정됐다”고 밝혔다.양현종이 없는 사이 KIA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1985년 이순철(외야수) 이후 무려 36년 만에 신인왕을 배출했다. 주인공은 광주제일고를 졸업한 1차 지명 신인 이의리였다. 이의리는 지난해 19경기에서 4승 5패 평균자책점 3.61을 기록했다. 발목 부상으로 시즌 후반엔 등판 횟수가 적었지만, 기록은 화려했다. 9이닝당 삼진(8.84개·10위), 피안타율(0.204·1위), 피OPS(피출루율+피장타율, 0.607·6위) 모두 리그 최상위권(100이닝 이상 선발투수 기준)이었다.이의리 역시 빠른 공을 던지는 왼손 투수다. 힘 있는 포심패스트볼과 비슷한 궤적에서 떨어지는 체인지업의 조합이 위력적이다. 팔 스윙이 빨라 타자가 대처하기 힘들고, 회전수(최고 초당 2380회)도 높아 좀처럼 강한 타구를 허용하지 않는 능력을 갖췄다.요즘 서울에서 개인 훈련 중인 이의리는 “발목은 이제 전혀 문제가 없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훈련을 하고 있다”고 했다. 가장 큰 목표는 부상을 당하지 않고 풀시즌을 소화하는 것이다. 이의리는 “안 다치는 게 가장 큰 목표다. (현재 선발 보직이) 제 자리가 아닌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이의리는 양현종의 후계자로 꼽히지만, 정작 두 선수는 아직 만난 적이 없다. 지난해 입단한 새내기 이의리는 아직 양현종을 직접 만날 기회가 없었다. 이의리는 “모든 면에서 아직 배울 게 많다. 지난해 프로에 데뷔한 첫 시즌을 보낸 신인인데 현종 선배님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라며 “나란히 이름이 거론되는 것조차 부담스럽다”고 했다. 후배 투수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는 걸 좋아하는 양현종과의 만남이 이의리에겐 발전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의리는 “지난 시즌 마운드에 오른 모든 순간이 재밌었다”며 올 시즌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KIA의 마지막 왼손 비밀병기는 올 시즌 첫선을 보이는 외국인 투수 놀린이다. KIA는 그동안 외국인 왼손투수로 재미를 본 적이 없다. 2017년 팻 딘이 올린 9승이 최고기록이다. 그런데 놀린은 구단 좌완 외인 사상 첫 10승에 도전한다. 놀린은 지난해 워싱턴 내셔널스에서 10경기(5선발)에 나와 2패 평균자책점 4.39를 기록했다. 연봉은 90만 달러지만 이적료를 지급했기 때문에 외국인 연봉 상한선(100만 달러)을 꽉 채웠다.권윤민 전력기획팀장은 “투수를 선택할 때 많은 고민을 했다. 먼저 계약한 외국인 투수 로니 윌리엄스는 불펜 경력이 많았다. 이에 비해 놀린은 커리어 내내 선발투수로 활약한 데다 이닝 이터(많은 이닝 동안 던지는 투수)라는 점이 돋보였다. 제구력이 뛰어난 점도 고려했다”고 밝혔다. 권 팀장은 또 “퀵모션 속도를 조절하거나 팔 각도를 올리고 내리는 등 마운드 위에서 영리한 모습에 주목했다”며 “평균 구속이 시속 140㎞대 중반인데 MLB에선 빠른 편이 아니지만 한국에선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공 끝이 지저분해 많은 땅볼 유도를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KIA는 지난해 선발 투수 평균자책점이 8위(5.04)에 그쳤다. 올 시즌엔 왼손 투수 트리오와 우완 윌리엄스, 언더핸드 임기영이 선발진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3명의 왼손 투수를 징검다리처럼 활용하면 좌-우-좌-우-좌로 이어지는 로테이션이 가능하다. 상위권 도약을 노리는 KIA의 꿈이 무르익고 있다.※KBO리그에 기록될 좌완듀오는?한국인 중 왼손잡이 비율은 약 5% 정도다. 왼손 투수의 비율은 20% 정도다. 그러다 보니 리그를 뒤흔든 왼손 투수는 많았지만, 좌완 듀오를 보유한 팀은 많지 않았다. 2021시즌까지 두 명의 왼손 투수가 한 팀에서 동시에 10승 이상을 거둔 사례는 16차례뿐이다. 좌완 10승 트리오는 단 한 번도 없었다.프로 원년인 1982년엔 삼성의 왼손 투수 권영호와 이선희가 나란히 15승을 거두며 30승을 합작했다. 왼손 투수가 많았던 삼성은 이후에도 성준-김일융(1986년), 김태한-성준(1993년), 차우찬-장원삼(2010·13년) 등을 배출했다.1990년대 가장 인상적인 좌완 콤비는 1995년 LG 트윈스의 이상훈과 김기범이다. 그해 이상훈은 30경기에서 20승 5패 평균자책점 2.01을 기록했다. 이후 국내 투수 20승은 2017년 양현종이 나올 때까지 22년이나 걸렸다. 이상훈, 정삼흠에 이어 LG 3선발이었던 김기범은 26경기에서 13승 7패 평균자책점 2.86을 기록했다.10승 투수는 한 명이지만 '레전드 좌완' 3명이 함께 뛴 팀도 있었다. 2006년 한화 이글스다. 그해 입단한 신인 류현진은 18승을 거두며 MVP와 신인왕을 싹쓸이했다. 마무리 구대성은 개인 최다인 37세이브를 챙겼다. 당시 만 41세였던 송진우는 그해 8승(8패)을 추가하며 통산 200승 고지를 밟았다.KBO리그 최고의 외국인 좌완 원투펀치는 2015년 넥센에서 뛴 앤디 밴헤켄(미국)과 라이언 피어밴드(미국)였다. 밴헤켄은 강속구 투수는 아니지만 절묘한 포크볼을 앞세워 20승을 거뒀다. 피어밴드 역시 위력적인 공은 아니지만, 좋은 제구력 덕분에 13승을 올렸다.가장 꾸준했던 사우스포 조합은 두산 베어스 장원준-유희관이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두 선수는 나란히 두 자릿수 승리를 따냈다. 이 기간 두산은 세 차례 한국시리즈에 나가 두 번 우승했다.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2022.01.1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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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④] '전쟁 같은 타격' 최정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많이 담장을 넘긴 우타자. 그리고 가장 많은 사구를 기록한 타자. SSG 랜더스의 간판 3루수 최정(35)이 일간스포츠가 선정한 40주년 올스타 3루수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세대별 야구인 10명씩 총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23표로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역대 최고의 3루수로 선정됐다. 최정은 공·수 모두 3루수 역대 최고로 꼽힌다. 프로에서 처음 주목받은 건 파워였다. 2년 차였던 2006년 리그 최고의 마무리 중 한 명이었던 구대성(한화 이글스)을 상대로 방망이를 부러뜨리고도 역전 스리런 홈런을 쳤다. 구대성은 부정 배트를 의심하며 항의했지만, 규격 외였던 건 방망이가 아닌 최정의 힘이었다. 덕분에 OB 베어스 시절 심정수의 별명이었던 ‘소년 장사’가 최정의 첫 별명이 됐다. 파워가 만개할 때까지 시간이 더 걸렸다. 먼저 꽃피운 건 수비였다. 2년 차 때까지만 해도 수비가 불안하다는 평가를 받은 그는 3루수가 아닌 1루수로 출장했다. 하지만 2007년부터 김성근 감독의 '지옥 훈련'을 받으며 수비를 강화했다. 번개 같은 포구와 빨랫줄 같은 송구를 선보이며 해가 갈수록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자리 잡았다. 공격력에서는 2000년대 최고로 꼽혔던 김동주(전 두산 베어스)에 미치지 못했지만, 끈끈한 수비력으로 3회 우승을 이뤄낸 SK 왕조의 한 축으로 활약했다. SSG 후배들이 그를 꼽은 이유도 수비였다. 외야수 최지훈은 “많은 분이 최정 선배님의 장타력을 장점으로 보지만, 선배님은 강한 어깨와 뛰어난 수비력도 갖추셨다. 같은 팀 선배로 가까이서 보니 더 대단해 보인다”고 치켜세웠다. 투수 박종훈도 “홈런뿐 아니라 수비에서도 뛰어나 멋진 선수”라며 “같은 팀이 아니었어도 선배님을 뽑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기대받았던 장타력도 각성하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 4년 연속 3할 타율 20홈런을 달성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을 키웠고, 타구 각도를 올리며 홈런 타자로 거듭났다. 2012년 26홈런-20도루, 2013년 28홈런-24도루로 2년 연속 20홈런 20도루 클럽에도 가입했다. 단단한 수비와 한 방을 갖춘 3루수를 넘어 공수에서 최정상급으로 활약하는 KBO리그 대표 3루수가 됐다. 2011년 첫 골든글러브 수상을 시작으로 3년 연속 3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부진의 시기도 있었다. 2014년과 2015년 부상으로 모두 100경기를 넘기지 못했다. 터널에서 빠져나온 최정은 최고의 홈런 타자로 진화했다. 2016년 개인 첫 시즌 40홈런을 쏘아 올렸다. 3루수로는 역대 최초로 40홈런 100타점 100득점을 달성하며 에릭 테임즈(전 NC 다이노스)와 함께 공동 홈런왕에 올랐다. 이어 2017년에는 46홈런 113타점을 기록하며 커리어하이를 다시 한번 경신했다. 3루수 역사상 최다 홈런, 구단 역사상 단일 시즌 최다 타점을 기록하며 2년 연속 홈런왕을 손에 거머쥐었다. 부침은 있었지만, 이후에도 최정의 홈런포는 쉼 없이 가동됐다. 2018년 부진으로 타율은 0.244까지 떨어졌지만 35홈런을 기록했다. 공인구 변화로 '투고타저' 현상이 두드러진 2019년에도 29홈런(리그 2위)을 기록하며 '홈런 공장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난 2년 동안에도 33홈런과 35홈런으로 모두 30홈런을 넘겼다. 최근 6년 동안 담장 밖으로 넘긴 홈런이 총 218개(연평균 36.3개)에 달한다. 이 기간 200개 이상을 기록한 타자는 오직 최정뿐이다. 기복 없는 활약 끝에 마침내 400홈런 고지를 밟았다. 최정은 지난해 10월 19일 KIA 타이거즈전에서 보 다카하시의 시속 149㎞ 직구를 받아쳐 개인 통산 400번째 홈런포를 신고했다. 통산 홈런 1위(467개) 이승엽(전 삼성 라이온즈·은퇴)에 이은 역대 두 번째 기록이자 우타자로는 첫 기록이다. 지난 시즌까지 최정의 통산 홈런은 총 403개로 이승엽의 기록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지금 페이스라면 늦어도 세 시즌, SSG와 계약 마지막 해 안에 통산 최다 홈런 경신을 노려볼 수 있다. 홈런보다 먼저 역대 1위에 오른 기록도 있다. 많이 친 만큼 많이 맞았다. 통산 사구가 294개에 달한다. 한·미·일 프로야구를 통틀어 가장 많은 기록이다. 20개 이상 사구를 맞은 시즌만 10회에 이른다. 200사구를 넘는 타자는 리그 역사상 최정과 박석민(NC·208개)뿐인데, 최정은 300사구까지 눈앞에 있다. 수백 개의 사구를 맞아도 최정은 피하지 않는다. 수없이 투구에 맞았고, 그보다 더 많은 홈런을 때렸다. 전쟁 같은 그의 타격은 투수의 몸쪽 공을 이겨낸 훈장이다. 최정의 기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많은 야구인이 최고의 3루수로 최정을 꼽은 이유도 그의 여전한 활약 때문이다. 어느덧 30대 중반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리그 최고의 홈런 타자로 군림하고 있다. 향후에도 꾸준한 활약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다. 김종국 KIA 감독은 "이범호(현 KIA 코치)도 있고, 김동주도 있어 3루수 투표를 가장 고민했다. 그래도 지금은 '리빙 레전드'로 향하고 있는 최정을 꼽겠다”라며 “그는 아직 현역 선수다. 아마 은퇴 후엔 그가 남긴 기록이 더 주목받을 것"이라고 칭찬했다. 최정이 홈런 타자로 각성하도록 도왔던 정경배 SSG 타격코치는 “최정은 몇 년 뒤에는 더 높은 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는 선수”라고 했다. 이대진, 조원우 코치(이상 SSG)와 후배 투수인 이의리(KIA), 송명기(NC) 역시 그의 꾸준함과 미래 기록을 높이 평가했다. 차승윤 기자 cha.seunyoon.joongang.co.kr 2022.01.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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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③]호타준족의 대명사 박재홍

한 번도 어려운 '30홈런-30도루' 클럽에 세 번이나 가입한 선수. '리틀 쿠바' 박재홍(49)이 일간스포츠가 선정한 40주년 올스타 외야수 부문 한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세대별 야구인 10명씩 총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장효조(26표), 양준혁(22표)에서 이어 외야수 중 세 번째로 많은 20표를 얻었다. 박재홍은 역대 외야수 중 세 손가락 안에 포함될 만큼 남다른 경쟁력을 보여줬다. 그는 잘 넘기고, 잘 훔쳤다. 개인 통산 300홈런을 때려낸 거포이면서, 도루를 267번이나 성공한 대도였다. 프로야구 무대에서 통산 300홈런 이상 때려낸 14명 중 200도루 이상 기록한 선수는 박재홍뿐이다. 호타준족(장타력과 빠른 발을 모두 갖춘 선수)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광주일고 시절 동기였던 김종국 KIA 타이거즈 감독은 "공·수·주에서 가장 완벽한 선수였다. 장타력까지 좋았다. 그야말로 야구 천재"라고 박재홍의 선수 시절을 돌아봤다. 광주제일고 재학 시절 4번 타자·에이스로 활약하며 특급 유망주로 평가받은 박재홍은 1992 신인 드래프트에서 해태 타이거즈(현재 KIA)의 1차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프로 무대에 바로 뛰어드는 고졸 선수는 드물었다. 박재홍도 연세대 진학을 결정했다. 대학 시절도 꽃길을 걸었다. 한국야구의 황금세대로 여겨지는 '전설의 92학번' 일원이었다. 국제대회에서 맹활약하며 1993년 국제야구연맹 올스타에 뽑혔고, 1995년 대학야구 춘계리그에서는 연세대의 우승을 이끌며 최우수선수상(MVP)·타점왕·도루왕을 거머쥐었다. 박재홍은 야구 선수로는 크지 않은 키(1m76㎝)에도 괴력을 뿜어냈다. 당시 아마야구 최강으로 평가받던 쿠바 선수들에게도 지지 않는다며 '리틀 쿠바'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박재홍은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고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다. 신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활약을 보여줬다. 5월 5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홈 더블헤더에서 3홈런 8타점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알렸고, 이후에도 홈런과 도루를 차곡차곡 쌓았다. '왼발이 배터박스를 벗어난다'라며 부정타격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7월 16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75경기 만에 20홈런-20도루, 9월 3일 LG 트윈스전에서 프로야구 역대 최초로 30홈런-30도루까지 달성했다. 박재홍은 1996시즌 타율 0.295 30홈런 108타점 36도루를 기록했다. 신인 선수가 홈런왕과 타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해 남긴 신인 선수 데뷔 시즌 최다 홈런(30개)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박재홍은 만장일치로 신인왕을 차지했고, 외야수 골든글러브도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투수 4관왕에 오른 한화 구대성과의 MVP 경쟁에서는 한 발 밀렸지만, 타자 중에서는 독보적인 퍼포먼스를 남겼다. 박재홍은 누구보다 강렬한 데뷔 시즌을 보냈다. 현재 20대 젊은 후배들이 그를 역대 최고의 외야수로 꼽은 이유다. 2021년 도루왕 김혜성은 "신인 선수가 해낸 30홈런-30도루 기록이기에 임팩트가 컸다"라고 했다. 2021년 신인왕 이의리는 "'호타준족'이라는 단어를 내가 인식할 수 있게 해주신 선배님"이라고 말했다. 박재홍은 1997시즌 허리 부상 탓에 96경기밖에 뛰지 못하고도 27홈런을 때려냈다. 이 부문 리그 4위에 올랐다. 1998시즌은 30홈런 43도루 기록하며 커리어 두 번째 30홈런-30도루를 해냈다. 그해 소속팀 현대의 창단 첫 통합 우승까지 이끌었다.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데뷔 4년 차(199시즌)에 억대 연봉(1억원)을 받은 선수로 이름을 올리며 가치를 인정받았다. 2000시즌은 개인 3번째 30-30클럽 가입뿐 115타점 101홈런까지 기록하며 커리어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현대의 창단 두 번째 한국시리즈(KS) 우승도 견인했다. 거칠 것 없던 박재홍의 야구 인생에도 시련은 있었다. 2001시즌부터 잔 부상에 시달리며 앞선 5시즌(1996~2000)보다 장타력이 떨어졌다. 2003시즌을 앞두고는 KIA로 트레이드됐다. 팀 쇄신을 노린 현대는 현금 10억원과 유망주 정성훈을 받고 간판선수를 넘겼다. 현대팬은 구단의 결정에 비난을 쏟아냈다. 박재홍은 KIA에서 자존심을 구겼다. 2003시즌은 타율 0.301 19홈런을 기록하며 나쁘지 않은 성적을 남겼지만, 2004시즌은 타율 0.253 7홈런에 그쳤다. 1군 등록일수를 채우지 못해 자유계약선수(FA) 자격 취득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섰다. 2004년 12월, 투수 김희걸과 1대1 트레이드로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은 그는 2005시즌 타율 0.304 18홈런을 기록하며 재기했다. 이후 4시즌(2006~2009)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쳐내며 SK가 강팀으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FA 계약도 두 차례 따냈다. 박재홍은 2009년 4월 23일 롯데전에서 도루를 추가하며 프로야구 최초로 250홈런-250도루에 가입했다. 하지만 300홈런-300도루는 해내지 못했다. 2012년 10월 3일 LG전에서 통산 300번째 홈런을 때려냈지만, 도루는 267개에서 멈췄다. 박재홍은 은퇴를 결정하고 해설위원으로 새 출발 하며 "남은 33개의 도루는 해설가로서 시청자 마음을 훔치겠다"라고 했다. 2013년부터 지금까지 방송사 해설위원으로 현장을 누비고 있다. 선수 시절 박재홍과 한솥밥을 먹은 정경배 SSG 랜더스 코치는 "30-30클럽에 3번씩 가입할 선수가 앞으로 몇 명이나 나올 수 있을까. 그가 남긴 기록의 가치는 정말 크다"라고 했다. 실제로 2000년 박재홍 이후 이 기록을 해낸 국내 타자는 나오지 않았다. 안희수 기자 an.heesoo@joongang.co.kr 2022.01.10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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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는? 선동열·최동원 '원투펀치'

임인년 새해가 밝았다. 한국 프로야구도 새로운 출발선에 설 시간이다. 1982년 3월 27일 닻을 올린 KBO리그는 지난해까지 40년간 숱한 스타플레이어들과 함께 환희와 감격의 역사를 쌓아왔다. 일간스포츠는 41번째 프로야구 시즌을 맞이하기에 앞서 야구인 투표를 통해 지난 40년간 그라운드를 빛낸 포지션별 최고 스타를 선정하기로 했다. 그 결과 선동열(59) 전 국가대표 감독이 투표인단 전원의 지지를 받아 '별 중의 별'로 뽑혔다. 일간스포츠 선정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는 선발투수 5명, 불펜투수 2명, 포수·1루수·2루수·유격수·3루수 각 1명, 외야수 3명으로 구성됐다. 해외 리그 성적이 아닌 KBO리그 성적만을 기준으로 삼아 각 포지션별 후보를 추렸다. 투표에 참여한 야구인은 총 40명. 20대, 30대, 40대, 50대 이상으로 그룹을 나눠 각 세대별 10명이 표를 던졌다. 포지션별 올스타 후보에 오른 야구인과 현역 선수는 투표인단에서 제외했고, 20~30대는 10개 구단 선수 중 연령대별 대표 1명씩을 포함했다. 이렇게 선정한 40주년 올스타 중 선발 투수 5명에는 선동열(40표) 최동원(37표) 류현진(36표) 송진우(22표) 박철순(17표), 불펜 투수 2명에는 오승환(32표) 구대성(19표)이 각각 이름을 올렸다. 이어 포수 양의지(24표), 1루수 이승엽(37표), 2루수 정근우(22표), 유격수 이종범(28표), 3루수 최정(23표)이 각 포지션 최고 선수로 뽑혔다. 3명을 선발한 외야수 부문에선 장효조(26표) 양준혁(22표) 박재홍(20표)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베스트 3' 안에 포함됐다. 선동열은 유일하게 투표인단 40명으로부터 모두 표를 받아 만장일치로 최다 득표자가 됐다. '불세출의 투수' 고(故) 최동원과 이승엽이 나란히 37표를 얻어 공동 2위에 올랐고, 메이저리그(MLB) 토론토에서 활약하고 있는 류현진이 36표로 그 뒤를 이었다. 현역 선수 중엔 류현진 외에 오승환(삼성), 양의지(NC), 최정(SSG) 등 3명이 40주년 올스타에 포함되는 영광을 안았다. 선동열은 명실상부한 KBO리그 역대 최고 투수로 꼽힌다. 1985년 해태(현 KIA)에 입단한 뒤 1995년까지 통산 367경기에서 146승 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 탈삼진 1698개를 기록했다. 통산 이닝당 출루허용(WHIP)은 0.80. 11시즌 중 5차례(1986·1987·1992·1993·1995)나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 2.00을 넘긴 시즌은 1994년(2.73)밖에 없다. 7년 연속(1985~1991)을 포함해 8번이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가져갔다. 특히 1986년에는 한 시즌 262와 3분의 2이닝을 던지면서 24승 6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0.99, 탈삼진 214개, 완봉승 8회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올렸다. 선동열은 1995년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면서 33세이브(평균자책점 0.49)를 올린 뒤 임대 선수로 일본 프로야구(주니치)에 진출했다. 이후 리그 정상의 마무리 투수로 이름을 날리다 한국에 복귀하지 않고 1999년 은퇴했다. KIA는 그 후 선동열의 등번호 18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40주년 올스타 선정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띈 건, 표를 많이 얻은 선수일수록 투표자들이 굳이 선정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동열에게 한 표를 던진 이유를 물으면 "이유가 필요하느냐"는 반문이 되돌아왔다. 선동열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은 최동원도 마찬가지다. 40명 중 단 2명을 빼고 모두 최동원을 올스타로 꼽았지만, "설명이 필요없다"는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1번으로 선동열, 2번으로 최동원을 뽑은 NC 이용찬은 "투수 대선배이신 이분들을 왜 뽑았는지 설명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했다. 실제로 최동원은 1984년 51경기에서 284와 3분의 2이닝을 던지면서 27승 13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한 '무쇠팔'이었다. 그해 최동원이 잡은 삼진 223개는 지난해 두산 외국인 투수 아리엘 미란다가 경신하기 전까지 36년간 역대 한 시즌 최다 기록 자리를 지켰다. 최동원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따내면서 롯데에 창단 첫 우승을 안기는 '신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1985년에도 20승 8세이브를 따내면서 평균자책점 1.92를 기록했고, 1986년엔 267이닝을 소화하면서 19승(평균자책점 1.55)을 올렸다. 그러나 프로에서의 첫 5년간 1209와 3분의 1이닝(평균 241.6이닝)을 책임진 여파로 이후 팔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고, 결국 1990년 삼성에서 은퇴했다. 전성기가 길지 않았는데도 그 누구보다 강했던 KBO리그 최고 투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2011년 대장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등번호 11번이 뒤늦게 롯데 영구 결번으로 지정됐다. 특히 많은 투표인단이 KBO리그 역사를 대표하는 선동열과 최동원의 라이벌 관계에 주목했다. 나이로는 5년 터울이고 프로 경력으로는 4년 선후배 사이였던 이들은 영남(최동원)과 호남(선동열), 연세대(최동원)와 고려대(선동열)의 대리전까지 펼친 필생의 맞수였다. 선수 시절 세 차례 맞대결 성적은 1승 1무 1패. 1986년 4월 첫 대결에서는 선동열이 완봉승을 따냈고, 최동원은 솔로홈런 하나를 맞아 1실점 완투패했다. 그해 8월에는 최동원이 선동열을 상대로 완봉승했고, 선동열은 자책점 없이 2실점(수비 실책으로 인한 비자책점) 완투패했다. 1987년 5월 16일 세 번째 대결은 '퍼펙트게임'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됐을 만큼 극적이었다. 두 투수가 연장 15회까지 완투하면서 4시간 56분 혈전을 벌인 끝에 2-2 무승부로 끝났다. 이날 선동열은 공 232개, 최동원은 209개를 각각 던졌다. SSG 박종훈과 키움 김혜성이 "당대 최고 라이벌이자 설명이 필요 없는 역대 가장 뛰어난 투수들"이라고 입을 모은 이유다. 류현진은 KBO리그에서 단 7년을 뛰고도 37명의 몰표를 받아 선동열과 최동원 다음으로 나설 '3선발'이 됐다. 그는 한화에서 데뷔한 2006년 다승(18승) 평균자책점(2.23) 탈삼진(204개) 타이틀을 휩쓰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면서 역대 최초로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와 최우수신인선수(신인왕)를 함께 수상했다. 이후 국가대표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7시즌 통산 98승 52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80을 남기고 2013년 MLB로 진출했다. 빅리그에서도 2020년 MLB 평균자책점 1위에 오르는 등 KBO리그 출신 선수 중 가장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현역 시절 류현진과 상대했던 이호준 LG 코치는 "난 오른손 타자였지만 왼손 류현진의 공을 정말 치기 어려웠다. 무릎과 옆구리 깊숙한 쪽으로 공이 파고 들어와서 몸에 맞는 공이 될 것 같은데 스트라이크가 선언되곤 했다"며 "공의 각도가 굉장히 좋았고, 체인지업을 포함해 여러 구종을 던지면서 모두 컨트롤이 좋았다. 다시 나오기 쉽지 않은 투수"라고 했다. 최태원 삼성 코치도 "왼손으로 시속 150㎞ 이상을 던지면서 경기 운영과 컨트롤은 역대 최고였다"고 했다. 류현진이 미국으로 떠난 뒤 한화로 온 포수 최재훈은 "설명이 필요없는 에이스"라며 "나중에 한화에서 배터리로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고 기대했다. 2명을 선정한 불펜 투수로는 오승환(삼성)과 구대성(전 한화)이 뽑혔다. 둘 다 강력한 구위 외에도 위기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는 강심장과 포커페이스로 이름을 날린 투수들이다. 이동욱 NC 감독은 "오승환과 구대성은 감독 입장에서 언제든 믿고 투입할 수 있는 투수"라고 했다. 오승환은 KBO리그 역대 한 시즌 최다(47) 세이브, 최다 연속경기(28) 세이브, 통산 최다 세이브(339) 기록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최고 마무리 투수다. 성적뿐 아니라 마운드에서의 위압감도 역대 최강이었다. 5년간 일본과 미국에서 뛰다 지난해 복귀했지만, 40세 나이에도 여전히 국내 최강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해 44세이브를 올려 구원왕 타이틀을 가져갔다. 최태원 삼성 코치는 "오승환이 마운드에 오르면 경기에 졌다고 여겼을 정도"라고 했다. 구대성은 1996년 다승 1위(18승)와 세이브 2위(24세이브)에 모두 이름을 올릴 만큼 전방위로 활약했다. 그러나 1996년부터 7시즌 연속(해외 진출한 2001~2005년 제외) 20세이브를 올렸고, 1999년 한화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직접 마무리하면서 더 강한 인상을 남겼다. 국제대회에서 '일본 킬러'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통산 성적은 67승 71패 214세이브, 평균자책점 2.85. 김종국 KIA 감독은 "구대성 선배처럼 배짱 있는 투구를 하는 투수를 본 적 없다"고 했고, KT 박경수는 "릴리스포인트가 보이지 않는 투수였다. 오른손 타자 몸쪽과 바깥쪽 제구가 자유자재였다. 너무 까다로웠다"고 기억했다. 포수 부문에선 역대 최고 공수겸장 포수로 꼽히는 양의지가 24표를 얻어 박경완(12표)을 두 배 차로 제쳤다. 양의지는 2020년 만장일치에 가까운 역대 최고 득표율(99.4%)로 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을 만큼 현역 중엔 적수가 없는 독보적 1인자로 꼽힌다. 2015년부터 '두산 왕조'의 전성기를 앞장서 이끌었고, 2019년 NC 이적 2년 만에 창단 첫 우승의 디딤돌을 놓았다. 2019년 35년 만에 포수 타격왕에 오르고 지난해 포수 첫 사이클링 히트 기록을 작성하는 등 공수 양면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장정석 KIA 단장은 "양의지는 결국 가장 좋은 기록을 남기고 역대 최고 포수로 남을 것 같다"고 내다봤고, 이호준 코치는 "야구 센스와 수비, 타격 모두 (NC 시절) 옆에서 지켜 보니 깜짝 놀랄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포지션 구분 없이 역대 최고 선수라고 본다"고 치켜세웠다. 최태원 코치도 "공 배합이나 경기 운영, 리더십을 보면 박경완일 수 있겠지만, 공격력으로 보면 양의지가 압도적"이라고 선택의 이유를 밝혔다. 이뿐만 아니다. 박경수는 "양의지가 안방에 있으면, 투수가 아닌 포수와 싸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고, KT 소형준도 "내가 만약 감독이라면, 양의지 선배를 기용할 것 같다"고 했다. 김인식 전 국가대표 감독은 "양의지가 선수 생활을 가장 오래 할 것 같다. 앞으로 다치지 않으면 5년은 더 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1루수 부문은 KBO리그 역대 최고 타자로 꼽히는 이승엽이 압도적으로 표를 얻었다. 이승엽은 1997년 삼성에서 데뷔한 이후 KBO리그 홈런의 역사를 다시 써왔다. 2003년 역대 한 시즌 최다 홈런(56개) 기록을 세웠고, 통산 최다 홈런(464개) 기록을 남기고 2017년 은퇴했다. 한국 프로야구에 처음으로 '400홈런'이라는 기록을 새긴 주인공이다. 일본에서 뛴 8년(2004~2011년) 성적을 포함하지 않았는데도 이승엽을 따라잡을 홈런 타자는 나오지 않았다. 일본전에서 결정적인 홈런이나 적시타를 때려내던 '국가대표 4번타자' 이승엽의 존재감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대체자가 없다. 실제로 수많은 투표인단이 "독보적", "압도적"이라는 감탄사를 쏟아냈다. 양상문 위원은 "이대호(롯데) 같은 선수도 뛰어났지만, 역대 최고 1루수는 단연 이승엽이다"라고 했고, 정경배 SSG 코치는 "그렇게 홈런을 많이 친 선수를 능가하는 타자가 있을까"라고 되물었다. SSG 최지훈은 "초등학교에서 야구하던 시절, 베이징올림픽(2008년) 야구 금메달의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다"며 "누구나 알고 있는 '레전드'라서 고민 없이 뽑았다"고 했다. 2루수 부문에선 정근우(22표)가 박정태(14표)를 넘어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2020년 은퇴할 때까지 16년간 프로에서 뛴 정근우는 통산 1747경기에 출장해 타율 0.302, 1877안타, 722타점, 1072득점, 도루 371개를 기록했다. 안타·타점·득점 모두 역대 2루수 중 최다 기록이다. 또 세 차례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숱한 국제대회에서 국가대표 주전 2루수로 활약했다. 정근우 스스로 은퇴 기자회견에서 "역대 최고 2루수는 내가 맞는 것 같다"고 인정했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했다. 소형준은 "2루 수비도 좋았지만, 타석에서 상대 배터리와 수비를 흔들 수 있는 타자였던 것 같다. 투수 입장에서도 상대하기 힘들 것 같았다"고 했고, KIA 이의리는 "악바리 같은, 근성 있는 모습이 같은 운동 선수로서 인상적이었다"고 떠올렸다. 김경기 위원은 "2루수는 꾸준히 레전드급으로 활약하기 힘든 포지션인데, 정근우는 그중 팀에 가장 큰 도움이 됐다. 2루를 대표하는 선수"라고 했다. 김종국 감독은 "함께 뛰어 본 선수 중 가장 좋은 2루수다. 공·수·주 모두 독보적이었고, 근성도 뛰어났다. 신체 조건이 좋은 편은 아닌데 그런 단점도 이겨냈다"고 높이 평가했다. 박경수는 "국가대표팀에서 보여준 좋은 플레이와 임팩트가 2루수 중 단연 최고"라고 했다. 쟁쟁한 후보가 많았던 유격수 자리는 이종범(28표)이 차지했다. 1993년 해태에서 데뷔한 이종범은 천재적인 야구 센스를 뽐내면서 공·수·주를 가리지 않고 펄펄 날았다. 1990년대 '해태 왕조'의 집권기를 연장한 주역이다. 특히 1994년에는 타율 0.393, 196안타, 113득점, 도루 84개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남겨 단숨에 프로야구 최고 스타로 등극했다. 타율 0.393은 프로야구 원년의 백인천(0.412) 이후 여전히 가장 높은 기록으로 남아 있고, 한 시즌 도루 84개는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울 기록 중 하나로 회자된다. 양상문 위원은 "이종범은 팀을 우승시킨 선수다. 개인 기록도 좋지만, 팀 기여도가 높았다"며 "김재박, 류중일, 류지현 등 뛰어난 선수가 많았지만, 이종범은 타격과 도루도 잘하면서 '유격수'라는 포지션이 공격까지 잘해낼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줬다"고 했다. 장정석 단장은 "그야말로 '야신'이다. 정말 야구를 위해 태어난 선수 같았다. 플레이가 리그 최정상급을 넘어 독보적이었다"고 평가했고, NC 송명기는 "수비, 타격, 주루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그냥 레전드"라고 했다. 조웅천 SSG 코치는 "박진만이라는 훌륭한 유격수조차 이종범이라는 큰 산을 넘기는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3루수 부문에선 현역 선수인 최정이 투표인단 중 23명의 선택을 받아 올스타로 뽑혔다. 김동주(11표), 한대화(5표)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전직 국가대표 3루수들을 제치고 57.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2005년 SK(현 SSG)에서 데뷔한 그는 지난 시즌 이승엽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400홈런 고지를 밟았다. 세 차례 홈런왕을 수상했고, 최근 6시즌 동안 2019년(홈런 29개)을 제외하고 매년 30홈런을 넘겼다. 현재 통산 홈런 수는 403개. 이승엽의 통산 최다 홈런 기록에 도전할 유일한 후보로 꼽힌다. 롯데 감독 출신인 조원우 SSG 코치는 "현재 기록도 뛰어난데 앞으로 더 많은 기록을 깰 것"이라고 했고, 김종국 감독은 "3루수가 가장 큰 고민이었지만, '리빙 레전드'로 향하고 있는 최정을 뽑았다. 아직 현역이지만, 아마 은퇴 후 그가 남긴 기록이 더 각광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의리는 "꾸준하게 좋은 기량을 유지하시면서 롱런하시는 부분이 부럽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SSG에서 한솥밥을 먹는 후배들은 공격력에 가려진 최정의 수비에 높은 점수를 줬다. 투수 박종훈은 "홈런 능력뿐 아니라 수비에서도 뛰어나 멋있는 선수인 것 같다. 같은 팀이 아니었어도 뽑았을 것 같다"고 했다. 외야수 최지훈은 "많은 분이 장타력을 강점으로 보시겠지만, 실은 어깨도 강하고 수비력도 뛰어난 선배님이다. 가까이서 지켜보니 더 대단해 보인다"고 감탄했다. 외야 세 자리를 지킬 선수로는 고(故) 장효조와 양준혁, 박재홍이 차례로 선정됐다. 장효조는 26표로 외야수 후보 중 가장 많은 표를 얻었고, 양준혁은 22표를 받았다. 투표인단 절반(20명)의 지지를 얻은 박재홍은 LG 출신 이병규(9번·18표)를 2표 차로 제치고 마지막 한 자리를 꿰찼다. '타격 기계'라는 별명의 원조인 장효조는 프로야구 초창기 최고의 왼손 콘택트 히터였고, 강팀 삼성의 간판타자였다. 프로에서 뛴 10시즌(1983~1992년) 중 4차례(1983년, 1985~1987년) 타격왕에 올랐고, 선구안이 좋아 "장효조가 치지 않은 공은 볼이다"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프로 통산 타율 0.331은 여전히 깨지지 않은 역대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고향팀 삼성에서 2군 감독을 맡고 있던 2011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 야구계를 안타깝게 했다. 이종열 SBS 해설위원은 "공격력 면에서 최고의 외야수였다. 장효조 선배님을 보면서 타격을 연구한 선수들이 많았다"며 "어떤 상황에서든 배트 중심에 맞힐 수 있는 선수"라고 했다. 박경수는 "학생 때 나를 지도해주신 많은 분이 늘 장효조 선배님을 언급하며 '너무 잘 치는 타자'라고 하셨다. 발도 빠르셨다고 들었다"고 떠올렸고, 삼성 백정현은 "팀 기여도가 눈에 보이는 기록 그 이상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정경배 코치는 "장효조 선배의 통산 타율은 현역 선수들의 기록보다 그 가치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며 "장효조 선배가 같은 선수가 또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양준혁은 KBO리그를 대표하는 타자 중 한 명이자 이승엽과 함께 삼성을 상징하는 레전드 스타다. 1993년부터 2010년까지 18년간 프로에서 뛰었는데, 3할을 넘기지 못한 시즌은 단 4번뿐이다. 통산 2135경기에서 타율 0316, 안타 2318개, 홈런 351개, 1389타점, 볼넷 1278개, 사구 102개를 기록하면서 은퇴 당시 기준으로 역대 최다 안타, 타점, 득점, 4사구 기록을 남겼다. 서용빈 감독은 "양준혁 선배는 장타, 콘택트, 기록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역대 최고 외야수로 빼놓을 수 없다"고 했고, 박경수는 "프로야구에 한 획을 그은 레전드 타자"라고 인정했다. 김혜성은 "항상 1루로 전력질주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고 했다. 박재홍은 '현대 왕조'의 주역으로 꼽힌 천재형 외야수다. 신인이던 1996년 홈런 30개를 치고 도루 36개를 해내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했다. 동시에 리그 역사상 유일한 '만장일치 신인왕'에 올랐다. 타격의 정교함, 파워, 견고한 수비, 강한 어깨, 빠른 발을 모두 갖춘 '5툴 플레이어'의 대표 격이다. 2000년대 후반 SK의 전성기에도 힘을 보탠 뒤 2012년 은퇴했다. 이의리는 "박재홍 선배님은 '호타준족'이 무슨 뜻인지 내가 인지할 수 있게 해준 선배님"이라고 했고, 김종국 감독은 "공·수·주에서 완벽한 천재형 선수다. 야구 하는 능력이 정말 좋았다"고 감탄했다. 조웅천 코치는 "최초의 30홈런-30도루를 해냈고, 그 후 두 번 더 같은 기록을 달성한 게 대단하다"고 했고, 김혜성은 "신인 선수의 30홈런-30도루가 쉽지 않은 만큼 더 인상적"이라고 기억했다. 배영은·배중현·이형석·안희수·차승윤 기자 2022.01.03 06:00
야구

'괴물' 계보 류현진-소형준의 데뷔 10승, 이렇게 달랐다

"감히 류현진 선배님과 비교가 될 순 없죠." KT 오른손 신인 투수 소형준(19)이 조아제약 8월 MVP(최우수선수) 수상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이전에도 류현진(33·토론토)과 함께 거론될 때마다 그는 민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개인적인 친분이 없기에 선배님이라는 부르는 것조차 멋쩍어했다. 그러나 소형준은 앞으로도 류현진과 비견될 것이다. 그는 지난 12일 수원 한화전에서 6⅓이닝 2실점을 기록하며 KT의 5-2 승리를 이끈 그는 개인 10승을 달성했다. 2006년 한화 루키 류현진이 역대 8번째로 기록한 뒤 13시즌 동안 후계가 없었던 '고졸 신인' 10승 투수가 된 것이다. 비범한 자질, 대찬 투구 그리고 신인답지 않은 배포가 닮았다. 의미 있는 기록에 차례로 이름을 올린 공통점도 있다. 팬들이 활약한 시공간이 다른 두 투수를 단순 비교하는 게 아니다. 류현진의 루키 시절을 추억하고, 소형준의 성장을 기대하는 마음을 담아 두 투수의 '데뷔 10승'을 비교하고 있다. ◈ 아홉수 없었던 소형준 류현진은 2006년 6월 8일 대전 SK전에서 1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데뷔 9번째 승리를 거뒀다. 6월 13일 삼성전에서 류현진은 5이닝 9피안타 6실점을 기록했다. 노 디시전. 18일 두산전에서 7이닝 2실점을 기록한 류현진은 8회 연속 피안타를 내준 뒤 마운드를 내려왔고, 한화 구원진이 역전을 허용했다. 당시 마무리투수는 구대성이었다. 2-2 동점에서 안경현에게 3타점 적시 2루타를 맞고 패전투수가 됐다. 류현진은 6월 23일 청주 KIA전에서 8⅔이닝 1실점(비자책)을 기록하며 한화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2전 3기 끝에 10승 고지에 올랐다. 구대성이 세이브를 기록하며 후배의 승리를 지켜냈다. 소형준에게는 아홉수가 없었다. 2020년 8월까지 8승을 기록했고, 9월 3일 수원 SK전에서 5이닝 2실점을 기록하며 9승 고지를 밟았다. 9일 만에 나선 12일 한화전에서 바로 10승을 거뒀다. 이강철 KT 감독이 6일 고척 키움전에서 불펜 투수를 선발로 내세우는 '오프너' 운영을 통해 그에게 휴식을 줬다. 충분히 쉰 소형준은 아홉수 없이 10승 고지에 올랐다. ◈리그를 흔든 수퍼 루키 류현진은 역대 신인 최소 경기 두 자릿수 승리 신기록을 경신했다. 10승을 거둔 KIA전은 그의 데뷔 14번째 등판이었다. 15경기 만에 10승을 거둔 1992년 염종석(롯데)의 기록을 바꿨다. 이 승리는 류현진의 전 구단(2006년은 8개 구단 체제) 상대 승리 경기이기도 했다. 그는 14경기 만에 7개 팀에 승리를 거뒀다. 더불어 리그 다승, 평균자책점(2.33), 탈삼진(111개) 부문 1위를 수성했다. 소형준은 18경기 만에 10승을 거뒀다. 류현진의 기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비교적 빠른 페이스다. 승률은 0.667. 첫 5경기에서 4승을 거뒀지만, 6월 중순부터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졌다. 2주 동안 휴식기를 가진 뒤 다시 상승세를 탔다. 최근 7연승이다. 소형준은 아직 전구단 상대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키움전에는 아직 한 번도 등판하지 않았고, 롯데와 LG전에서도 승리한 적이 없다. 6개 팀을 상대로 1승 이상 거뒀고, 두산과 SK를 상대로 3승씩을 챙겼다. 두 투수 모두 쟁쟁한 선배들보다 돋보였다. 소형준이 10승을 거둔 날, 다승 부분 공동 6위에 올랐다. 류현진처럼 1위는 아니다. 그러나 국내 투수 중에서는 가장 먼저 10승에 도달했다. 소형준은 탈삼진 63개를 기록 중이다. 소형준은 시즌 10승을 거둔 한화전에서는 한 경기 최다 탈삼진(9개)을 기록했다. 신인 시절 류현진은 시속 150㎞ 안팎의 강속구를 앞세운 파워 피처였다. 소형준은 투심 패스트볼과 컷 패스트볼(커터)을 주무기로 사용하며 맞혀 잡는 투구를 한다. 12일 현재 리그 국내 투수 가운데 땅볼 유도(141개)가 가장 많다. ◈에이스가 에이스를 이끌다 두 투수는 프로 입단 후 훌륭한 선배들을 만나 성장했다. 류현진은 구대성으로부터 체인지업을 배웠다. 그의 야구인생의 궤적을 바꾼 구종으로 꼽힌다. 소형준은 휴식기 동안 커터를 연마했다. 우타자 기준 몸쪽으로 휘어지는 투심 패스트볼과 바깥쪽으로 꺾이는 커터가 뛰어난 조합을 이루고 있다. 남다른 학습 능력도 둘의 공통점이다. 류현진의 능력은 메이저리그(MLB)에서도 화제가 됐다. LA 다저스 시절부터 한솥밥을 먹던 투수 로스 스트리플링은 "누군가는 커리어 내내 커터를 연마한다. 류현진은 하룻밤에 배웠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체인지업이 류현진을 KBO리그 최고의 투수로 만든 공이라면, 커터는 MLB 정상으로 이끈 구종이다. 소형준도 짧은 시간에 커터를 연마했다. 외국인 투수 오드리사머 데스파이네, 윌리엄 쿠에바스에게 그립을 배웠다. 류현진에게서는 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다. 소형준은 "투구 영상을 보며 (커터를) 던지는 느낌을 참고했다"고 했다. 미래의 에이스를 만든 건 현재의 에이스들이었다. 류현진은 "구대성 선배에게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배웠고, 송진우 선배에게는 제구력과 몸 관리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말했다. 당시 한화의 투수코치는 고(故) 최동원이었다. 한국 야구 레전드들이 기술과 멘탈을 잡아줬다. 류현진도 자신의 야구인생 최고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소형준에게도 탁월한 안목으로 기회와 믿음을 준 이강철 감독과 박승민 코치가 있다. 선배이자 룸메이트인 선발투수 배제성도 평소 자신이 생각하는 마운드 위에서의 마음가짐을 조언했다. 소형준의 포커페이스는 배제성에게서 배운 것이다. 안희수 기자 An.heesoo@joongang.co.kr 2020.09.14 06:00
야구

장민재가 김민우에게···"우리 함께 잘해보자"

"저는 너무 늦게 깨달았잖아요. 그 친구들은 안 그랬으면 해요." 한화 오른손 투수 장민재(29)는 후배 투수 김민우(24) 이름이 나오자 미소부터 지었다. "장민재 인터뷰지만 김민우 얘기를 하고 싶다"는 농담에도 "그럴 줄 알고 있었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렵게 시즌 첫 승을 거둔 김민우를 보며 "마치 '내 새끼'가 잘된 기분이라 내가 더 기분이 좋았다"고도 했다. 장민재와 김민우의 남다른 우정이 관심을 받게 된 건 지난 14일 대전 키움전이 끝난 뒤다. 1회 실점을 하고 들어온 선발투수 김민우에게 장민재가 한참 진지하게 조언하는 모습이 중계 화면에 잡혔다. 김민우는 이 경기에서 시즌 첫 승을 신고한 뒤 "1회에 포크볼이 높게 들어가 고전했는데 송진우 투수코치님과 장민재 형의 조언을 들은 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장민재는 다음 날 "김민우가 (시즌 6경기 만에) 첫 승을 따낸 뒤 서로 얼싸안고 축하 인사를 나눴다"며 "민우랑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 사이다. 잘 던지는 모습을 보고 나니 마치 '내 새끼'가 성공하는 것을 본 기분이었다"고 활짝 웃었다. 장민재와 김민우는 나란히 올해 한화 선발진에 대체선발로 투입됐다. 개막 직후 젊은 유망주들이 부진하면서 두 사람에게 차례로 기회가 왔다. 장민재는 지난 수년간의 경험을 살려 무난하게 선발진에 안착했지만, 김민우는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고 들쑥날쑥한 성적을 냈다. 한용덕 한화 감독은 그런 김민우를 보고 안타까워하며 "마운드에서 장민재의 전투력을 보고 배웠으면 좋겠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한 감독의 바람대로 장민재는 김민우에게 훌륭한 멘토 역할을 했다. 김민우의 절친한 친구이자 함께 토종 선발진을 이루고 있는 김범수도 장민재의 마음이 향하는 후배다. 장민재는 "민우와 범수 모두 마운드 밖에서는 정말 순하고 착한 친구들이다. 하지만 경기에 나가서는 독기를 품고 던지기를 바랐다"며 "구위를 떠나 투수의 마운드 위 행동이 강해 보여야 상대 타자들도 위축된다. 그런 배짱을 더 갖길 바라는 마음으로 민우와 범수에게 얘기를 많이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4일 등판 때 김민우가 보인 눈빛은 장민재에게 '합격점'을 받았다. 장민재의 표현에 따르면, '타자를 잡아먹을 것 같은 강한 눈빛'을 마침내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나 역시 아직 배워 가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이런 마음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다. 민우와 범수는 나보다 더 빨리 알게 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장민재가 후배들을 다독이는 진짜 이유도 있다. 장기적으로 한화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고 싶어서다. 그는 "어렸을 때 나도 송진우 코치님이나 구대성 선배님 같은 분들의 말 한마디에 많은 걸 느끼곤 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그런 말을 해 주고 싶다"며 "나뿐 아니라 민우나 범수 같은 선수들이 더 잘해야 한화에 또 한 번 '황금기'가 오지 않겠나. 사람들이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하던데, 그런 의미에서 나도 모터를 달고 앞으로 가고 싶은 기분"이라고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대전=배영은 기자 2019.05.1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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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은퇴 투어 어린이 사인회, 이니셜 박힌 손목 밴드 선물”

첫 번째 '은퇴 투어'에 나서게 된 이승엽(41·삼성)은 10일 대전 한화전 경기 시작 30여분 전인 오후 6시에 3루측 더그아웃 옆 관중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기 준비를 위해 몸을 풀러 나온 그는 언제나 그랬듯 그물망을 두고 5분 가까이 팬들과의 미니 사인회의 시간을 가졌다. 떠나는 이승엽이나, 그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팬들이나 이제 마지막을 기념하고 준비한다. 한국야구위원회(KBO)와 10개 구단은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는 이승엽을 위해 KBO 리그 최초로 '은퇴 투어'를 마련했다. 그 첫 번째 무대는 10일~11일 대전에서 열리는 한화-삼성전에서 시작된다. 이승엽은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하다. 좋은 추억을 쌓고 싶다"고 말했다. -오늘(10일)부터 은퇴 투어를 시작하게 됐다. "사실 야구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그라운드에 도착해 팬들의 격려를 받고 이렇게 인터뷰를 하니까 실감난다." -대전구장에서의 추억이 있다면. "한국을 대표했던 좌완 투수인 구대성 선배님은 지금껏 상대해본 투수 가운데서도 아주 뛰어난 선수였다. 구대성 선배께 워낙 약했는데 대전에서 홈런을 한 번 때린 적 있다. 펜스를 맞고 넘어가는 홈런이었다." -은퇴 투어를 부담스러워했다. "사실 많이 어색하고 생소하다. 프로의 무대에서는 이겨야하는 게 최우선이니까. 그래도 막상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하다. 간소하게나마 이번 행사를 통해 좋은 추억을 쌓고 싶다. 특히 후배들이 부담을 느끼거나 안 좋게 받아들이까봐 염려되는 측면도 있다." -매 은퇴 투어 때마다 어린이 팬들과의 사인회를 갖기로 했다. "야구장 안팎에서 어린이 팬을 마주할 기회가 많지 않다. 팬서비스를 할 기회가 적다. 이런 자리를 빌어 그 동안 못했던 것을 하고 싶다.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원정구장 마지막 경기에서 추억을 쌓고 싶다." -은퇴 투어 행사가 훈련에 지장은 없나."어린이 팬 사인회는 크게 문제 없다. 평소에 그런 기회가 자주 없으니까…오히려 사인회 때 이름이 새겨진 손목 밴드를 선물하려 한다. 대전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 준비하지 못했지만 다음부터 꼭 준비할 것이다." -이런 은퇴 투어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사실 프로야구를 떠나 우리 한국 사회가 아직도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부족하지 않나 싶다. 프로야구도 응원팀을 떠나 상대팀, 상대 선수에 대해 좀 더 존중해주시면 좋은 문화가 정착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은퇴를 실감하나?"이제 느껴진다. 주변에서 '섭섭하다' '만나면 헤어짐이 있다'고 하는데 이제 시간이 다 오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기분 좋게 떠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다. 다만 후배들이 부담을 느끼거나 안 좋게 받아들이까봐 염려되는 측면이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대기록을 작성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와 지금 많은 관심을 받는 데 있어 차이점이 있나?"그때는 야구를 잘해서 많은 인터뷰를 했다. 다만 그로 인해 슬럼프에 빠진 적도 있다. 지금은 짠하다. 은퇴를 앞두고 있지만 많이 축하해주시니 감사하다." 대전=이형석 기자 2017.08.10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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